글 제목부터 별 시덥지 않은 아재개그냐고 물어오신다면 일단 죄송하다고 사과부터 드리고 시작한다. 그런데 그 말이 딱 어울리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대전 저 아래 변두리에 위치한 <원정역>이라는 간이역.
간이역이라 하면 한적하고 작고 아담한, 내리면 할머니가 마중나와있을 것 같은 정겨운 느낌이 난다. 대전에도 많은 간이역들이 있지만 여객취급과 화물취급이 중단되어 역으로써의 기능을 상실하고 신호장으로 쓰거나 아예 폐역이 되어 철거가 되거나. 이것이 요즘 간이역의 운명이다.
하지만 오래되고 필요없다고 다 없애면 우리는 과거를 어디서 추억해야 할까. 그래서 허름한 간이역이라고 해도 존재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대전의 원정역은 여객도, 화물도, 신호장도 아니지만 존재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는 간이역이었다.
대전에서 외곽으로 꼽히는 흑석동에서 또 23번 버스를 타고 더 외곽으로 나가면 무도리가 나온다. 이곳이 아는 사람만 안다는 대전의 한적한 간이역, 원정역이다. 버스도 하나 밖에 다니지 않는 아주 평화로운 한 마을. 나도 대전에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간이역이 다 없어진줄만 알고 있었다가 대전광역시 블로그에 소개된 내용을 보고서야 알게됐다. 벼르고 벼르다가 촬영을 위해서 이곳을 찾았다.
예전에는 이곳도 살아있는 역세권이었기 때문에 기차로도 갈 수 있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여객취급이 중지되어 외곽버스인 23번만이 다닌다. 그마저도 배차시간이 28분에 이른다. 흑석리에서 한 번 놓치면 대략 30분 가량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흑석리 버스정류장 옆에는 미니스톱 편의점이 있는데 거기서 커피든 치킨이든 먹으면서 여유롭게 기다리면 된다. 이정도쯤이야.
나는 출발할 때는 먹을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그냥 지나쳐버렸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아른아른거리는 치느님(편의점 출신이긴 하지만)을 무시하지 못하고 돌아올 때 사먹고야 말았다. 어차피 사먹을거였으면 고민하는 쓸데없는 시간 낭비 하지 말껄.
버스에서 내리면 낡은 버스정류장이 일단 반기고 있다. 옛날에는 벽돌로 지어진 전형적인 시골 버스정류장이었는데, 어디서 가져왔는지 재활용한 철제 버스정류장으로 바뀌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틱한 분위기 폴폴 뽐내주는 너란 녀석, 너란 간이역.
원정역은 지금은 모든 입구가 막혀있는 상태다. 심지어는 출입구를 벽돌로 매워버렸을 정도. 이미 2006년에 폐역이 되었고, 역이 폐쇄된 지 오래 됐지만 왜 아직까지 놔두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현재는 선로보수원의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고. 그와중에 역 측면에 그려진 벽화가 눈에 띈다.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이 조그맣고 허름한 간이역에 과연 누가?
역 구내로 진입하는 철문은 자물쇠로 굳게 닫혀있지만 그 너머로 생동감있는 기차 벽화가 그려져있어 자칫 을씨년스러웠을 지 모르는 건물에 생기가 도는 듯 보인다. 원정역은 완벽하게 전철화가 완료된 호남선에 위치하고 있어 사실 벽화에 그려진 디젤전기기관차가 견인하는 열차가 그리 많이 다니지는 않는다. 대부분은 전기를 에너지로 사용하는 전기동차나 전기기관차가 많이 다녔지만, 간간히 디젤전기기관차가 지나가기도 했다.
디젤기관차가 그려진 벽화 뒤로 디젤기관차가 지나가는 장면은 영상으로 촬영했다. 영상은 맨 밑에 소개하기로 한다.
원정역이 위치한 무도리라는 동네는 참으로 조용하고 한적했다. 사람이 살고있나 싶을정도로 조용했고, 발소리를 내는 것 조차 죄송할 정도였다. 지나가는 길목에 반겨주려면 반겨주지 사납게 짖어대던 주먹만한 멍멍이들정도가 마을에 누군가가 살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벽화마을로 조성되기도 했다는 블로그 포스팅을 봤지만 나는 원정역과 기차 중심으로 촬영을 진행하자니 시간이 매우 부족했다. 그래서 벽화마을은 가볼 수가 없었다. 아마 나만 몰랐던 모양이다. 벽화마을과 간이역이 대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뒤였는데 나는 이제야 알아버렸다. 그리고 원정역과 그 주변 마을이 한적하고 아름답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나 자신과 약속해본다. 다음에는 부디 점심식사거리도 챙겨오고 일찍 와서 원정역과 그 주변을 충분하게 돌아보겠노라고. 물론 여름은 피해서 다시 오겠다고.
그리고 이거는 꿀팁인데, 원정역에서 호남선 하행방향으로 조금만 따라가다보면 육교 하나가 나온다. 여기는 철도덕후들에게 추천할만한 훌륭한 촬영 포인트이다. 하행과 상행열차 모두 잘 잡히는데다 멀리서 오는 열차를 관측할 수 있어 카메라 앵글을 미리 준비하기 수월하다.
원정역을 좀더 생동감있게 보고자 한다면 영상으로 감상해도 좋다.
사진에서는 소개되지 않은 앵글들이 많이 찍혀있다. 사실 영상촬영을 목적으로 간 것이고, 사진은 그와중에 부수적으로 찍힌 것이라 사진은 양이 많지 않다. 다양한 원정역의 모습은 영상에서 확인하길 바란다.